
2026년 오늘, 집에서 OTT를 통해 영화 ‘모가디슈’를 다시 감상했습니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1991년 소말리아 내전 한복판에서 남북한 외교관들이 손을 잡고 탈출했다는 실화가 있었다는 사실에 정말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픽션보다 더 영화 같은 이 현대사의 한 페이지는 볼 때마다 마음이 묵직해집니다. 당시 우리 외교관들이 겪었을 사투는 기록된 활자 그 이상의 처절함이었을 겁니다.
세상 무너지는 줄 모르고 딱지치기하던 나의 어린 시절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기를 떠올려보니 저는 동네 골목에서 친구들과 해가 질 때까지 딱지치기하고 구슬 굴리며 뛰어놀던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때는 골목 어귀에서 풍기는 밥 짓는 냄새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신호였죠. 엄마가 대문 밖으로 나와 소리치며 이름을 부를 때까지는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 그 좁은 골목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던 참 속 편한 시절이었습니다. 흙먼지 묻은 손을 옷에 대충 닦으며 집으로 달려가던 그 평화로운 저녁이 누구에게나 당연한 것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렇게 아무 걱정 없이 웃으며 골목을 누비던 그때, 지구 반대편 모가디슈에서는 국가라는 시스템이 통째로 붕괴되고 있었습니다. 전기와 수도가 끊기고 발전기 기름마저 떨어져 가는 상황에서 우리 외교관들이 느꼈을 공포는 상상조차 하기 힘듭니다. 단순히 밥 한 끼 먹는 것조차 목숨을 걸어야 했던 그들의 사투를 보면서, 제가 당연하게 누렸던 그 평범한 일상들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 부동산 업을 하며 사람들에게 안식처를 찾아주는 일을 하다 보니, 영화 속에서 찢기고 부서진 도시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옵니다. 집이라는 공간이 보호막이 되어주지 못하는 세상은 그 자체로 지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남북 이전에 '가족을 지키는 엄마'로서 본 목숨 건 탈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차량에 두꺼운 책들을 방탄용으로 붙이고 도심을 가로지르는 탈출 과정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건 도박이었죠.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 등 뒤에 있는 가족과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운전대를 잡았던 그들의 손떨림이 화면 밖까지 전해지는 듯했습니다. 책장에 꽂혀 있던 지식의 상징인 '책'이 생존을 위한 '방패'가 된 아이러니한 상황이 이들의 절박함을 더 잘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북한 외교관들이 가족을 평양에 남겨두고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체제를 위해 가족을 볼모로 잡는 비인간적인 환경 속에서도, 그들 역시 우리와 똑같이 자식을 걱정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부모라는 사실이 피부로 와닿았습니다. 대사관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깻잎 한 장을 떼어주며 나누던 그 짧은 시간은, 어떤 정치적인 구호보다 훨씬 더 절실한 인간애였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부모의 마음으로 그 장면을 보고 있자니, 그들이 나눈 것은 음식이 아니라 서로의 생명에 대한 예의였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대학생 딸과 함께 본 기록 뒤의 진실
이번에 대학생인 우리 딸과 이 영화를 다시 보며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딸아이는 기록된 사건 자체보다 그 속에 갇힌 사람들의 마음에 더 집중하더군요. 딸아이가 "엄마, 저 사람들은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얼마나 허탈했을까?"라고 묻는데 할 말이 없었습니다. 사선을 넘는 순간에는 하나였지만, 도착하는 순간 다시 적이 되어야 하는 현실이 너무나 가혹하게 느껴졌습니다.
생사를 함께 넘나들며 등을 맡겼던 동지들이었지만, 비행기 문이 열리는 순간 다시 남이 되어야 했던 그 마지막 장면. 서로 아는 척도 못 하고 각자의 차를 타고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딸아이와 저는 한참 동안 침묵했습니다. 이념이라는 게 도대체 뭔데 사선을 함께 넘은 인연조차 인사 한 번 못 나누게 만드는지 참 원망스럽더군요. 딸아이와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게 실감 나면서도, 우리가 여전히 이 분단의 현실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하게 다가왔습니다.
영화와 실제 사건은 어떻게 달랐을까?
역사적 사실을 찾아보니 영화적 연출을 위해 각색된 부분들이 꽤 있었습니다. 우선 영화에서는 북한 대사관 일행이 남한 대사관으로 먼저 찾아오지만, 실제로는 탈출기를 기다리던 모가디슈 공항에서 처음 마주쳤다고 합니다. 탈출 경로 역시 이탈리아 대사관뿐만 아니라 루마니아 대사관 등을 거치며 사투를 벌였고, 결국 이집트행 구조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차량 탈출 장면도 영화처럼 화려한 교전보다는, 이동 중에 소말리아 정부군의 오인 사격을 받아 북한 서기관 한 분이 안타깝게 순직하신 것이 실제 기록입니다. 영화 속 운전하던 요원의 죽음은 이 비극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셈이죠. 긴박한 탈출 끝에 케냐 나이로비에 도착해서도, 영화처럼 서로 눈길 한 번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헤어져야 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의 아픔이었습니다. 이탈리아 군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탈출한 이 실화는 당시 외교부 내에서도 한동안 쉬쉬했던 비화였다고 하니 더욱 놀랍습니다.
이제는 뉴스에서 국가 간의 갈등 소식을 접할 때마다, 그 복잡한 뉴스 뒤에 가려진 진짜 사람들의 얼굴을 먼저 떠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알던 상식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이 영화 덕분에, 딸아이와 함께 우리 현대사의 아픈 페이지를 제대로 마주할 수 있어 참 다행인 시간이었습니다. 기록은 승자의 것이나 권력자의 것일지 몰라도, 그 기록을 채우는 뜨거운 눈물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겨봅니다.
[참고 자료 및 출처]
외교부 과거사 기록: 1991년 소말리아 내전 당시 남북 외교관 탈출 관련 비공개 문서
국가기록원: 냉전 말기 아프리카 외교 전 및 남북 유엔 가입 경쟁사
강대진 前 소말리아 대사 회고록: "모가디슈의 탈출" 관련 증언